가. 금지금의 부가가치세와 관련된 분쟁의 개요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금지금 유통시장 및 부가가치세 과세처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금지금 유통업체들 중에는 면세금을 수입하여 유통시키다가(매입가 100) 과세금으로 전환하여 도매상에게 매도한 후[매도가 110(부가세 10 포함)] 부가가치세를 신고, 납부하지 않고 폐업하는 이른 바 ‘폭탄업체’가 다수 존재하였다. 한편, 금지금 수출업체들은 도매상으로부터 부가세를 지급하고 금지금을 매입하여 수출하므로(영세율) 금지금과 관련한 매출부가세를 납부하지 않으면서 매입부가세를 환급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거래 구조 아래에서 과세관청이 수출업체에게 매입부가세(10)를 환급하면, 국가가 폭탄업체가 포탈한 부가세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과세관청은(폐업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폭탄업체가 아닌) 원고와 같은 수출업체들에 대한 매입부가세 환급을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수출업체들은 이에 반발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초기에는 수출업자들의 청구를 인용하였으나, 그 후 이례적으로 종전 입장을 바꾸어 “매출세액의 포탈을 목적으로 하는 악의적 사업자가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매입세액 공제ㆍ환급이 다른 세수의 손실을 가져온다는 사정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수출업자가 매입세액의 공제ㆍ환급을 구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공법상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하여 수출업체의 청구를 기각하였다(대법원2009두13474, 2011.1.20. 전원합의체 판결).

나. 이 사건의 경위

원고들은 금지금 수출업체로서 부가세 환급세액을 신고하였고, 관할세무서장은 환급세액의 대부분을 매입세액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정결정을 함과 동시에 가산세를 부과하였다(이하 ‘이 사건 부과처분’). 이에 원고들은 이 사건 부과처분에 대해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위 2009두13474 판결 선고 이전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대법원2009두6070, 2009.7.23. 판결. 이하 ‘이 사건 확정판결’).

그 후 원고들은 피고인 대한민국에게 이 사건 확정판결의 취지에 따라 과세관청이 환급을 거부한 부가세 매입세액(이하 ‘쟁점세액’)을 환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피고는 이를 거부하였다. 원고들은 이에 피고를 상대로 쟁점세액에 대한 환급을 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 피고는 소송과정에서 원고들

이 폭탄업체의 존재를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수출업자이므로 원고들이 쟁점세액의 반환을 구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하였다.

대상판결의 제1심 판결(서울중앙지법2010가합73913, 2010.12.28. 판결)은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인용하였다. 그러나 대상판결의 항소심 판결(서울고법2011나12707, 2012.2.3. 판결)은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들의 청구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행사이거나 불법원인급여의 반환청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이 사건 확정판결로 인해 “원고들은 피고에 대하여 그 존재와 범위가 확정되어 있는 쟁점세액 상당 금액의 환급을 구할 수 있(고)……, 피고도 위 확정판결의 기판력 또는 기속력으로 인하여 위와 같은 환급세액의 존부나 범위를 더 이상 다툴 수 없(다) …… 그렇다면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 원고들이 확정판결의 취지에 따라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소로써 쟁점세액의 환급이행을 구하는 것을 민법상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행사로 볼 수는 없고, 이는 종전 소송에서 확정된 조세법률관계가 실체적 법률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원고들의 주장이 신의성실의 원칙상 용인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원고들이 피고에게 직접 매입세액을 납부한 바 없는 이 사건에서 원고들이 피고에게 쟁점세액의 환급을 구하는 것을 불법원인급여의 반환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하여 원심 판결을 파기, 환송하였다.

이 사건 확정판결로 인해 원고들은 피고에 대한 쟁점세액 상당의 조세환급채권(이하 ‘이 사건 채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피고의 주장은 원고들이 이 사건 채권을 행사하는 것이 민법상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민법상 신의칙’)에 위반되거나 불법원인급여의 반환을 구하는 것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피고는 민법상 신의칙 위반을 항변 사유로 삼았으나, 그 근거사실은 “원고들이 폭탄업체의 존재를 알았거나 중과실로 알지 못한 수출업체”라는 점으로서 전소인 이 사건 확정판결의 과정에서 이미 주장하였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주장이 이 사건 확정판결의 기판력과 기속력에 비추어 허용되는 것인지 문제된다.

가. 피고 주장의 요지

피고의 주장은 원고들이 공법상 신의칙 위반한 자들이므로, 이 사건 채권을 청구하는 것은 민법상 신의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즉, 피고의 주장은 공법상 신의칙과 민법상 신의칙이 동일한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 민법상 신의칙의 의의 및 적용 요건

민법상 신의칙의 적용요건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법률 규정이나 판례에 나타난 태도 등을 종합하면 민법상 신의칙이 적용되는 대표적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권리 남용(「민법」제2조 제2항), 금반언(禁反言)의 원칙, 불법원인급여의 반환 금지(「민법」제746조)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된 것은 민법상 신의칙 중 “권리자가 권리행사를 위해 자신의 불법적인 행태를 원용해야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법이 조력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원칙을 구체화하여 규정한 것이 민법 제746조이나, 대법원은「민법」제746조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법이 그 권리행사에 조력하는 것이 정의에 반함이 명백하여 일종의 불법행위로 취급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권리행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대법원99다32899, 2001.11.13. 판결 등).

특히, 대법원은 위 99다32899 판결에서 “확정판결의 내용이 단순히 실체적 권리관계에 배치되어 부당하고 또한 확정판결에 기한 집행채권자가 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그 집행행위가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할 수 없고”, “확정판결에 기한 강제집행이 불법행위로 되는 것은 당사자의 절차적 기본권이 근본적으로 침해된 상태에서 판결이 선고되었거나 확정판결에 재심사유가 존재하는 등 확정판결의 효력을 존중하는 것이 정의에 반함이 명백하여 이를 묵과할 수 없는 경우로 한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설시한 바 있다.

다. 이 사건의 경우

민법 제746조는 “불법을 원인으로 인하여 재산을 급여한 때에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는 바, 위 규정은 문언상 자신이 급여한 것의 반환을 청구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그러나 대상판결이 적절히 설시하는 바와 같이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도매상들로부터 매입세액을 부담하고 금지금을 매입하였을 뿐, 피고에게 재산(매입세액)을 직접 급여한 바 없으므로,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고들이 민법상 신의칙을 위반한 것인지가 문제되는 바, 이 사건은 이 사건 확정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납부세액의 반환을 구하는 것으로서 전소(前訴)인 확정판결의 효력을 후소(後訴)에서 민법상 신의칙에 기해 부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조세소송에서 조세부과처분 등의 취소판결이 확정되면 판결 주문에 따로 납부세액의 반환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과세관청은 아무런 이의 없이 환급절차를 이행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이 사건에서는 과세관청이 위와 같은 이유로 환급을 거부한 것이다.

돌이켜 이 사건을 보면 설령 피고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원고들이 폭탄업체의 존재를 알았거나 중과실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단지 확정판결의 내용이 실체적 권리관계에 배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특히 피고는 위와 같은 사실을 이 사건 확정판결의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주장하였거나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 확정판결의 변론 과정에서 피고의 절차적 기본권이 근본적으로 침해된 상태라거나 이 사건 확정판결에 재심사유가 존재하는 경우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선행 취소판결에 기해 환급금의 이행을 구하는 후행 민사소송에서 전소에서 주장하였어야 할 신의칙 주장을 허용하는 것은 결국 전소에 재심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분의 위법여부에 대한 재심을 허용하는 결과가 된다(이러한 점에서 전소에서 과세관청이 이와 같은 신의칙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 확정판결로 이 사건 부과처분이 위법하다고 확정된 이상 피고의 환급의무는 사법적(司法的)으로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위법한 조세부과로 인한 납부세액을 환급하여 달라는 원고들의 주장을 민법상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 쟁점의 정리

형식적으로 공법상 신의칙과 민법상 신의칙은 요건이 서로 다르므로, 이론상 공법상 신의칙을 위반한 행동이 민법상 신의칙 위반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과 같이 과세관청이 선행 취소소송에서 주장하였거나 주장할 수 있었던 사실을 후행 민사소송에서 민법상 신의칙의 근거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선행 취소판결의 기판력과 기속력에 비추어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다수의 학설은 납세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하는 환급금청구소송의 성격을 공법상의 당사자 소송이라고 보고 있다. 조세환급의 당부에 관한 법률문제는 사법상의 그것이 아닌 공법적 법률관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수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 사건의 경우 공법상 혹은 민법상 신의칙을 가릴 것 없이 동일한 공법상 신의칙 적용문제로서 따로 그 적용영역을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나. 취소판결의 기판력과의 관계

확정판결은 기판력을 가지므로(「행정소송법」제8조,「민사소송법」제216조), 후소법원은 전소의 기판력 있는 판단을 다투기 위한 당사자의 주장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不可爭), 동시에 전소의 기판력 있는 판단에 구속되어 이를 전제로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不可反). 취소판결과 조세환급을 구하는 민사소송은 당사자가 동일하고, 취소판결의 소송물은 “과세표준 및 세액의 객관적인 존부”로서 조세채무의 부존재확인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므로, 조세채무가 없음을 전제로 기 납부한 세액의 환급을 구하는 민사소송과는 이른 바 선결관계에 있다. 특히 이 사건 확정판결의 경우 부가세 환급채권의 존재와 범위가 확정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채권존재확인” 소송의 성격도 있고, 따라서 후소인 민사소송과 이른 바, 동일관계에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렇다면 전소인 이 사건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후소인 대상판결에 미친다. 따라서 피고는 전소의 사실심 변론종결 전에 존재하였던 공법상 신의칙 위반을 구성하는 사실을 대상판결의 변론과정에서 주장할 수 없고(不可爭), 대상판결은 전소인 이 사건 확정판결 판단에 구속되어 원고들에게 국세환급채권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不可反).

다. 취소판결의 기속력과의 관계

처분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은 그 사건에 관하여 행정청을 기속한다(행정소송법 제30조). 즉, 처분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이 선고되면 행정청은 동일한 사실관계 아래에서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내용의 처분을 반복할 수 없고(소극적 효력), 위법한 처분으로 인해 발생한 법률상태를 원상으로 회복시킬 의무를 부담한다(적극적 효력). 대상판결에서 피고가 원고들에 대해 쟁점세액의 반환을 거부하는 사유는 이 사건 부과처분의 처분 근거 사유와 동일하므로, 결국 피고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이유로 쟁점세액의 반환을 거부하는 처분을 하는 것이고(소극적 효력 위반), 이는 동시에 위법한 이 사건 부과처분으로 발생한 법률상태(부가세 반환 거부)를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않는 것에 해당하여(적극적 효력 위반), 이 사건 확정판결의 기속력에 정면으로 반한다.

이 사건에서 피고는 전소인 이 사건 확정판결의 과정에서 주장하였거나 주장할 수 있었던 사실(공법상 신의칙 위반)을 그대로 가져와 대상판결의 변론과정에서 민법상 신의칙 위반의 근거사실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고의 태도는 전소인 이 사건 확정판결의 기판력과 기속력에 반할 뿐 아니라, 조세소송을 실질적으로 6심제(행정소송 3심, 민사소송 3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이 사건 제1심 판결은 위와 같은 법리를 그대로 적용한 당연한 판결이었다고 할 것인 바, 이와 달리 피고의 일방적 주장을 받아들인 원심을 파기한 대상판결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